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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안시성' 비판
    한국사랑/고구려사 2019. 1. 31. 19:11

    제 1차 고당전쟁(645) 빨강: 고구려 군의 진격로, 점령되지 않은 고구려의 성 노랑: 당나라 군의 진격로 하양: 당나라에 항복한, 점령된 고구려의 성 회색: 자연 지물 청록: 교통로 made by Jomocsa using Applemap.



    0. 김광식 감독이 가로되 '안시성 관련 기록이 세 줄 밖에 없다' 하였는가? 삼국사기 한 권에만 최소 60줄 이상(A4 기준)이다.....감독의 무식함과 용감함에 박수를 보낸다. 아마 영화 만들면서 은연 중에 자신의 공부량이 세 줄 밖에 안 된다고 밝힌 것은 아닐지...


    1. 첫 자막부터 '당나라 군 20만'이란 글이 나왔다. 종전의 통설은 사료를 비평없이 복붙하여 당군의 규모가 10만 대군(육 6만, 해 4만)이라고들 이야기했었다. 그러나 이는 선발대에 해당하는 규모일 뿐, 당군 전체의 숫자라 하기 어렵다. 휘하에 약 1만명 정도를 거느리는 총관의 수가 40명에 달했기 때문이다. 즉 육군만 해도 4~50만명인 것이며 최근 연구에 따르면 645년 당시 당나라 육군의 규모는 약 50만 명, 해군의 규모는 약 7만명이라고 한다.


    2. 첫 부분에 나온 주필산 전투에서 연개소문이 지휘하고, 결과는 대패인 것으로 나왔다. 주필산 전투의 결과에 대해서는 말들이 참 많지만, 고구려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1차 전투에서 패배하여 당군에 항복한 고구려 장수의 이름은 고연수와 고혜진이다. 두 사람의 직책은 '욕살'로, 휘하에 2~3만 명 정도의 병력을 이끄는 직책이다. 그런데 주필산 전투에 참가한 고구려의 전체 병력은 15만 명이다. 우리나라 육군 규모로 보면 15만 명은 야전군 급이고 2~3만 명은 사단 급이니 욕살은 곧 사단장 정도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소장(별 두개)이 대장(별 네개)의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가? 고연수, 고혜진은 15만 대군의 일부를 이끌었을 뿐이지, 총사령관이라 할 수 없다. 15만 군의 총사령관은 기록에 나오는 ‘대대로(大對盧)’ 고정의이다(기록에 따라 ‘대로’로도 나온다. ‘대대로’는 총리 격이다. 대로라고 해도 5관등인 위두대형 이상의 고위직이다). 즉 선봉대 격에 해당하는 장수 두 명이 패배하여 항복했다고 15만 군 전체가 패배한 것은 아니다. 아울러 연개소문이 그 군대를 이끌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또한 영화 후반부에 연개소문이 마음을 바꿔 지원군을 이끌고 온 것도 사실이 아니다. 15만 지원군은 주필산 전투에서 패배하지 않고 여전히 안시성 주변에서 당군을 압박했다.


    3. 안시성주의 이름은 양만춘이 아니다. 양만춘이란 이름은 15세기가 돼서야 중국측 문집에서나 등장할 뿐이다.


    4. 안시성주와 연개소문이 반목했는가? 당태종 이세민이 그런 말을 들었다고 한 기록은 있지만 그대로 사실이라 보긴 무리가 따른다. 연개소문의 쿠데타가 642년, 1차 고당전쟁은 645년에 벌어졌으므로, 쿠데타 직후 잠시 반기를 들었다 하더라도 3년이면 충분히 수습 가능한 시간이다. 당나라의 침입 앞에서도 여전히 둘이 반목했다면, 1차 고당 전쟁이 고구려의 승리로 끝나기 어려웠을 것이다. 적진 앞의 내부분열, 패배의 지름길 아닌가? 고당 전쟁의 결말이 양자 간 반목설을 잠재우는 강력한 근거이다.


    5. 안시성이 뚫리면 바로 평양으로 직행할 수 있나? 지금까지 발견된 고구려 성 유적이 200개가 넘고, 상당수는 요동에 밀집되어 있다. 첨부한 지도에서 볼 수 있듯 오골성, 석성, 박작성 등과 같은 주요 성이 두 성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6. 당군이 안시성을 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영화는 전혀 보여주지 못했다(감독이 기록을 딱 세 줄만 본 까닭이겠지). 현도성, 개모성, 요동성, 백암성, 비사성을 함락시키며 초반 승승장구하던 당군은 백암성 동쪽 궁장령을 넘지 못한다. 그래서 주요 교통로 위에 자리한 신성과 건안성을 공격했으나 실패한다. 유일한 대안은 안시성을 점령하여 편령을 넘어 오골성으로 향하는 것뿐이었다. 


    7. 안시성 전투가 조선 시대에 이르러 주목을 받았지만, 막상 당사자인 당나라는 신성, 건안성, 주필산 전투를 3대 하이라이트로 꼽았지, 안시성 전투는 언급하지도 않았다. 안시성은 주필산을 포함한 요동 곳곳에서 고구려군의 압박을 받던 당군이 만난 '막다른 골목'에 불과하다.


    8. 안시성이 현재 어디였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려우나, 주필산과 먼 거리에 있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영화에서는 주필산에서 사흘 밤낮은 걸어야 안시성에 도달하다는 걸로 조작했으나 주필산은 안시성 인근에 있는 나지막한 산일 뿐이다. 이름도 당나라 말들이 오래 머물렀다 해서 주필산이라 불린 것뿐...


    9. 안시성의 현재 위치가 어딘지 정확히 모르므로 재질이 석성이었는지, 토성이었는지, 영화에서처럼 겉은 돌이고 속은 흙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석성이라고 투석기에 약한 것이 아니고 토성이라고 강한 것이 아니다. 투석기의 집중 공격으로 12일만에 무너진 요동성은 토성이었다. 안시성이 중국의 견해대로 오늘날 영성자산성이라면, 산성이기에 투석기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해 공격력이 반감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0. 태학은 고구려의 최고 교육 기관으로 알려져 있고, 영화에서도 장교들을 키우는 학교인 것처럼 묘사됐지만 사실이 아니다. 태학은 중하급 관리를 양성하기 위한 학교이다(자세한 설명은 생략).


    11. 작중 인물들이 '고구려 사람', '고구려인' 운운했지만 나는 어디서도 고구려 사람다운 인물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상투에 비녀를 꽂는 것은 중국의 풍습이지, 고구려의 풍습이 아니다. 고구려인들이 애용한 건, 절풍, 조우관, 책과 같은 모자는 이 작품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다. 고구려 벽화에서 흔히 보이는 새깃 달린 모자 등 말이다. 옷차림도 거의 중국풍이고...


    12. 이외에...

    -고구려 사람들이 석유를 사용했나? 기름 주머니를 던진 후 불화살을 쏴 불을 지르는 장면은 정말 어이 상실이다.

    -민초들을 이번에도 大를 위해 희생되어야만 하는 小로 묘사한 이유는 대체 무엇인가?

    -위기에 몰린 주인공, 지위와 상관없이 낮은 자세로 섬기는 주인공, 일치단결하여 위기를 타파하는 주인공, 너무 식상한 패턴 아닌가?

    -안시성 가는 길에 장군총은 왜 있나.....

    -당태종이 전쟁이 끝나고 3년 후(648년)에 죽었다고 했는데 649년에 죽었다. 이건 백과사전 하나만 찾아봐도 알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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