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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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신대 1981년 항공 사진교회사랑/감리교신학대학교 2019. 3. 30. 15:05
1981년 감신 항공 사진. 1번: 정문. 지금의 정문과 달리 고풍스러운 멋이 있었다. 1998년에 현재의 정문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 건립 연대는 불분명하나, 남아 있는 사진을 보면 웰치 채플과 청암 기념관과 양식이 유사, 1959~1960년 즈음으로 추정. 2번: 선교사 사택. 1910년대식 붉은 벽돌조 건물이다. 감신이 냉천동으로 이전했을 무렵 세워진 초창기 건물 중 하나. 2007년에 역사박물관으로 리모델링 되었다. 3번: 잘 모름... 동아리실? 4번: 웰치 채플. 웰치는 1930년 미 남북 선교회가 통합하여 하나의 '기독교조선감리회'를 이루는 데 공헌을 한 감독. 웰치 채플은 1959년 웰치 감독의 헌금으로 건립되었기에 그 이름을 땄다. 2002년 웨슬리 채플 건립을 위하여 철거. 건축가 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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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감리교 장로교 교세 차이 이유교회사랑/한국교회사 2019. 2. 21. 03:33
우리나라의 최대 개신교단은 장로교회다. 비록 크게는 네 개, 작게는 200여 개로 쪼개져 있는 상황이지만, 이를 한 묶음으로 봤을 때 장로교가 한국 최대의 개신교단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약 600만). 반면 감리교는 약 140만으로, 장로교의 약 1/5 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그런데 이와 같은 한국의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매우 이례적이다. 장로교는 16세기에 형성된, 개신교 주요 교파 중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전 세계의 장로교회 교인수는 그리 많지는 않다. '개혁교회'라는 범주로 잡았을 때는 전 세계적으로 7천 5백만 명 가량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지만, '장로교회'로 한정했을 때 1,8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감리교회는 '웨슬리안'이라는 범주로 잡았을 때는 약 3억 7천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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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도의 균형 잡힌 영성교회사랑/한국교회사 2019. 2. 8. 18:30
역시 그 해 1931년 가을이었다. 원동교회 집회를 인도하시던 목사님은 어느 가족의 눈물겨운 형편을 듣게 되었다. 김OO씨의 가족이 끼니를 굶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또 직접 보셨다. 그는 누구나 다 아는 사람이다. 어떤 일을 하다가 결국은 OO을 당했다. 그 가족이 살던 곳에서 더 이상 살 수가 없어 마침내 OO를 떠나 한국에 건너와 경성에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야박한 경성 인심은 그들을 거들떠 보지도 않았다. 조밥 몇 술도 얻어 먹지 못해 굶고 있었다. 이 소식을 목사님께서 듣게 된 것이다. 목사님이 그 집엘 찾아갔을 때도 대여섯 되는 식구들이 차가운 냉돌방에 서로 마주 보고 앉아 얼굴만 쳐다보며 허기를 달래고 있었다. 그 때 목사님께서 어떻게 하셨는지 알 수 없다. 다음에 있는 얘기는 그 후에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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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신학대학교의 역사 1- 배재학당 내 신학반(1887)교회사랑/감리교신학대학교 2019. 1. 31. 18:58
감리교신학대학교는 기독교대한감리회, 약칭 '감리교'의 직영 신학대 중 하나다. 그러나 장로교와 달리 감리교는 오랫동안 하나의 신학교 체제 하에 역사가 진행되어 왔기에 감리교신학대학교는 한국 감리교회의 대표 신학교이자 감리교의 신학교육 그 자체를 의미해 왔다. 감리교신학대학교의 개교 연도를 따지는 데에는 먼저, 감신이 세워진 목적과 감신이 오랫동안 한국 감리교회 내에서 차지한 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본래 '개교'는 '학교'라는 이름으로 공식적인 문을 연 것을 의미한다. 이 기준으로 감신의 개교 연도를 따지면 1907년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감신은 오랫동안 감리교 내에서 이루어진 신학교육 그 자체를 상징하는 학교였기에, 한국 땅에서 감리교 신학 교육이 이뤄진 해가 감신의 개교 연도가 되었다. 미국 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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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감리교신학대학교 설경교회사랑/감리교신학대학교 2019. 1. 30. 23:02
1960년대 감리교신학대학교의 설경 사진을 공유해 본다. 이때가 감신의 전성기가 아니었을지... 1960년대에 감리교단은 50년대의 호헌파 분열과 70년대의 경기연회 분열 사태 사이에 소강 상태를 맞이하고 있었다. 물론 59년도의 재통합은 갈등의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지 못한 일시적 봉합에 불과했다. 그래서 성화파, 호헌파, 정동파 각 계파 간의 상호 견제가 첨예했던 때가 60년대였다. 그럼에도 그 이전과 그 이후 총회 분열까지 일어났던 상황에 비하면 1960년대는 조용했다. 오랜만에 찾아온 교단의 안정은 감신에도 좋은 영향을 미쳤다. 59년도에 대학으로 승격한 데에 힘입어 윤성범과 유동식을 필두로 한 토착화 담론으로 한국 신학을 최전선에서 이끌었던 때가 1960년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