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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감리교 장로교 교세 차이 이유
    교회사랑/한국교회사 2019. 2. 21. 03:33

    출처: https://m.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esign9125&logNo=221282090193&proxyReferer=https%3A%2F%2Fwww.google.com%2F



    우리나라의 최대 개신교단은 장로교회다.


    비록 크게는 네 개, 작게는 200여 개로 쪼개져 있는 상황이지만, 이를 한 묶음으로 봤을 때 장로교가 한국 최대의 개신교단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약 600만). 반면 감리교는 약 140만으로, 장로교의 약 1/5 가량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와 같은 한국의 상황은 전 세계적으로 봤을 때 매우 이례적이다.


    장로교는 16세기에 형성된, 개신교 주요 교파 중 나이가 많은 편에 속한다. 그럼에도 전 세계의 장로교회 교인수는 그리 많지는 않다. '개혁교회'라는 범주로 잡았을 때는 전 세계적으로 7천 5백만 명 가량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지만, '장로교회'로 한정했을 때 1,800만 명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 감리교회는 '웨슬리안'이라는 범주로 잡았을 때는 약 3억 7천만 명이며, 감리교회로 한정했을 때는 약 8천만 명을 기록한다(웨슬리 신학에 바탕을 둔 감리교회(8천만 명), 성결교회(1천 2백만 명), 오순절(2억 8천만), 구세군(160만 명)을 합친 수). 장로교는 역사와 전통이 감리교보다 길고 깊지만 전 세계적인 교세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세계적인 추세와 다르게 한국에서만 유독 감-장의 교세가 역전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감리교 목사의 한 사람으로서 원인을 분명히 알고 밝혀야 할 책임을 느낀다. 내 교파만 생각하는 교파주의를 주장하기 위함이 아니다. 한국 교회의 주요 교단 중 하나인 감리교회의 실패(실패라는 말에 어폐가 있지만)를 통해 한국 교회에 남길 중요한 사실을 얻고자 할 뿐이다.


    여러 경로로 두 교회의 역사를 비교해 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아직 확정된 논거라 할 수는 없으니 독자 제위의 따끔한 질책 바란다.


    1. 선교 정책의 차이


    두 교단의 교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선교 정책이라 할 수 있다. 개신교 선교는 19세기에 본격화 되기 시작했다. 여기서 '선교'라는 말은 '전도'와 다르다. 두 단어 모두 '복음을 전하는 것'이지만 후자가 동일 문화권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면 전자는 타 문화권 안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즉 선교란 유럽 문화권 영역 밖으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 가톨릭은 이미 16세기 종교개혁의 역풍을 맞고 선교를 시작하여 명나라와 일본까지 선교사를 보냈지만 개신교회는 18세기 경건주의에 의해 간헐적으로 시도되다가 19세기에 이르러 본격화 된다. 그리고 이때 어떤 선교를 할 것인지 다양한 선교 정책이 쏟아져 나왔고 이를 개략적으로 '직접적인 선교 방식'과 '간접적인 선교 방식'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직접적인 선교 방식이란 말 그대로 복음을 있는 그대로 전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예수를 믿을 것을 권하고,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는 방식이다. 이는 가장 오래되고 전통적인 선교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 방식은 선교를 공식적으로 허가하지 않은 국가나 문화권 등에서는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간접적인 선교 방식으로, 복음을 우회적으로 전하는 것이다. 특히 기독교 국가가 산업, 경제, 문화적으로 발달해 있었기에 후진국가에 문명 혜택을 주면서 우회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었다. 가령 병원, 학교, 언론 등의 문화적 혜택을 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이 점에서 방식이 서로 달랐다. 장로교회는 1884년 알렌을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했지만 알렌은 안수 받지 않은 평신도 선교사였으며 의사로서 제중원의 초대 원장을 맡았다. 이듬해 언더우드가 안수 받은 선교사로는 최초로 들어와 육영공원 등에서 교사로 활약하다가 아직 공식 선교를 허가 받지 못한 상황에서 내지로 깊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감행했다. 1890년에 들어온 사무엘 마펫(마포삼열) 선교사는 언더우드보다 더욱 직접적인 선교 방식을 선호한 인물이었다. 반면 감리교회는 1884년 일본 주재 미 감리회 매클레이 선교사가 내한하여 의료, 교육 사업 분야의 허가를 받은 이후 1885년 스크랜튼 선교사가 시병원을,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스크랜튼 대부인이 이화학당을, 하워드 선교사가 보구여관을 세움으로써 간접 선교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1-1 선교 정책의 차이


    이렇게 직접 혹은 간접적인 방식으로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선교를 하던 두 교회는 1891년 분수령을 맞게 된다. 

    바로 중국에서 선교하던 베테랑 선교사 네비어스(John. L. Nevius)의 선교 정책을 공식 선교 정책으로 채택한 것이다.

    '네비어스 선교 정책'이란 3자(自) 원칙에 기반을 둔 선교 정책이다. '3자'란 '자전' '자립', '자치'로 타 문화권에서 선교를 할 적에 현지 교회는 토착인이 토착인을 전도해야 하며[自傳], 토착 교인의 힘으로 교회 운영과 목회자 생활비를 책임져야 하며[自立], 토착 교회 문제를 토착인들이 스스로 치리해야[自治] 한다는 것이다. 네비어스는 오랜 기간 중국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많은 실패와 경험 끝에 이 3자 원칙을 1885년 발표했고, 언더우드는 이에 주목 1886년부터 공부를 했고, 1890년에는 네비어스를 직접 초청하여 그의 선교 정책을 집중적으로 배우게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공식 선교 정책으로 채택한 것이다. 


    반면 감리교회는 초창기에 설정한 간접 선교와 사회 개혁을 추구한 기독교 문명론을 유지했고, 장로교회와 비슷하게 중국에서 활동하던 올링거가 조선 선교사로 오면서 이 노선은 더욱 강화되었다. 감리교회의 선교 정책은 개인 구원보다는 사회 개혁에 초점이 맞춰진, 그리고 기독교 문명이 우월하다는 전제가 깔린 것이었다. 


    두 교회가 채택한 서로 다른 선교 정책의 결과일까, 두 교회의 교세는 10년도 채 안 되어 뚜렷하게 대비되어 나타났다. 1903년 원산에서 남감리회의 하디 선교사의 주도로 원산 부흥 운동이 일어났지만 그 열매는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을 주도한 장로교회가 가져갔다. 토착 교회와 토착 교인들의 훈련을 통해 부흥의 열기를 고스란히 소화했던 덕이 아닐까 싶다. 1907년을 기점으로 두 교회의 교세는 두 배 이상의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1910년 기준 북장 약 10,000명, 북감 약 5,000명).


    2. 선교 역량의 집중


    서두에서 언급하였듯 전 세계적인 교세에 있어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큰 차이를 보인다. 특히 한국 교회의 모교회인 미국 교회의 경우 양자 사이의 교세는 뚜렷했다. 감리교회는 선교 백년도 채 안 되어 미국 내 제 1 교단으로 급부상했지만 장로교회는 그렇지 못했다. 내가 보기에 미국에서의 성패가 되려 한국에서의 성패를 가른 주된 요인이 된 것 같다.


    무슨 말이냐 하면, 미국에서의 승리에 도취된 미 감리교회는 해외 선교에 사활을 걸 이유가 적었다는 것이다. 반면 장로교회는 미국에서 실패했기에 이를 해외 선교를 통해 만회할 필요가 있었고, 더욱 적극적으로 선교해야 했다. 마치 16세기 종교개혁으로 유럽에서의 교세가 반토막 난 로마 가톨릭이 예수회를 통한 공격적인 해외 선교로 교세를 만회한 것과 비슷한 역사가 나타났다고 본다. 


    이는 조선 선교에 투입된 두 교회의 선교 자금 액수의 차이를 통해 뒷받침된다. 구체적인 액수는 후첨.... 여기에는 선교부의 관심 차이도 있었겠지만 언더우드 가의 풍부한 재력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본다. '언더우드 타자기'로 유명한 언더우드 가문이 바로 조선에 들어온 언더우드 선교사의 집안이었다.


    3. 교회 구조의 차이


    감리교회와 장로교회는 교리와 교회 구조 면에서 많은 차이를 보인다. 감리교회는 명칭부터가 '감독이 치리하는 교회'라는 뜻으로 감독(주교)이 존재하며 감독의 치리를 받는 감독제 교회이다. 따라서 교역자의 인사권을 비롯한 교회의 굵직굵직한 일들은 감독의 치리 하에 처리되게 된다. 그래서 감독의 파송 하에 교역자는 빈번하게 이동한다. 반면 장로교회는 명칭부터가 '장로들이 치리하는 교회'로서 16세기 교회의 타락을 불러온 주교(감독)의 권한을 다수의 장로들로 분산시켜 민주주의에 가까운 교회 정치 구조를 갖고 있다. 목회자는 교회가 청빙하여 상황만 맞는다면 은퇴할 때까지 한 교회에 머물며 사역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장로교회의 구조가 감리교회에 비해 토착 교회 설립에 유리했으며 목회자의 이동이 빈번한 감리교회와 달리 장로교회는 한 목회자가 안정적으로 한 교회에서 오랫동안 목회를 집중할 수 있음으로써 교회 성장에 크게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4. 선교부 수의 차이


    유의미한 차이를 가져왔을지 모르겠지만 한국에 들어온 두 교회의 선교부 수의 차이도 두 교회의 교세 차이에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미국의 주요 개신교단은 남북전쟁을 전후로 하여 남북으로 갈라졌다. 먼저 미국의 북장로교와 북감리교가 한국에 들어왔다(1885년). 유명한 언더우드 선교사와 아펜젤러 선교사가 바로 각각 북장과 북감의 선교사였다. 이후 1889년에는 호주에서 장로교회 선교사가 들어왔고, 1892년에는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가 들어왔다. 이어 1893년에는 캐나다 장로교회가 들어왔다. 미국 남감리회는 이보다 조금 늦은 1894년 윤치호에 의해 들어왔다. 그러나 감리교의 경우 캐나다와 호주 쪽에선 선교사를 파송하지 않았다. 즉 한국에 들어온 감리교회 선교부는 2개에 불과했지만 장로교회는 그 두 배인 4개였다.


    3배, 4배도 아닌 겨우 2배이지만 2배의 차이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결과의 차이는 더욱 크다. 선교부가 2배라면 파송하는 선교사는 더욱 많고, 선교사가 많으면 그만큼 할 수 있는 일도, 선교할 지역도, 전도할 대상도 더 늘어난다. 물론 앞서 언급했듯 한국 장로교회의 약진은 북장에 힘입은 것이고 다른 선교부의 역할은 미미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선교부 수의 차이가 두 교회의 교세 차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1909년에 완비된 두 교단과 예하 선교부 간의 선교지 분할과 그 이후 지역간 발전 정도의 차이가 교세 차이에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1909년에 최종 정리된 감-장 선교지 분할의 결과는 아주 개략적으로 쓰면 다음과 같다. 인구 5,000명 이상의 대도시는 공동 선교(서울, 평양 원산 등), 전라도(남장로회), 경상도(호주 장로회), 함경도(캐나다 장로회), 평안도(북장로회), 충청, 개성, 강원, 경기 등은 주로 북감과 남감이었다. 해방 이후 38선 이북이 공산화 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에 있던 장로교인들이 대거 월남하였고, 군사 정부 시절에 영남권이 발달하면서 인구가 증가하는 효과도 보았다. 즉 선교부의 수와 선교지 분할이 결코 영향이 미미했다고 보기 어렵다.


    5. 3.1 운동의 여파?


    더 공부해야겠지만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장로교보다 감리교였다. 민족 대표 33인 중 16명이 개신교인이었고 그 중 9명이 감리교인, 7명이 장로교인이었다. 9명 중 징역 2년 형 이상의 중죄를 받은 사람이 8명이었다. 3.1 운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것은 일제로부터 더 많은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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