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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 시대 상복과 시복의 변화 1
    한국사랑/조선사 2019. 1. 30. 23:15

    조선의 관복은 용도에 따라 크게 다섯 가지 종류로 나뉜다. 공복, 시복, 상복, 제복, 조복이 그것이다. 이 중 공복과 제복, 조복은 형태와 용도가 명확히 구분되어 혼동되기 쉽지 않지만, 시복과 상복은 용도와 형태가 혼동되는 경우가 많다. 이에 대한 연구로 안동대 이은주 교수의 "조선시대 백관의 시복과 상복 제도 변천", 2005의 논문이 나와 있다.


    ​먼저 시복(時服)과 상복(常服)의 의미부터 살펴보자. 상복은 항상 상 자로 일상복을 의미한다. 시복은 때 시 자로 특정한 상황에 입는 옷이다. 이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조선 후기에는 두 개념이 서로 반전된다.


    ​1. 조선 초기(용도 미분화)


    ​일단 시복과 상복은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딱히 구분되어 있지 않았다. 동일한 내용에 대해 실록은 시복으로, 오례의 등에서는 상복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를 볼 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시복과 상복은 호칭만 달랐을 뿐 같은 옷이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조선 초기란 세종 28년(1446년) 이전을 의미한다. 상복의 색은 옅은 색은 피하고 주로 홍색과 같은 밝고 짙은 색이 권장되었으나 원칙상 색상에 제한은없었다. 이를 잡색(雜色)이라 한다.


    2. 16세기 이전(용도 분화)


    ​1) 용도 분화의 시작


    ​세종 28년 왕이 명령을 내리기를, 조참, 상참, 조계, 칙서 받을 시, 회례연, 사신 영접 시, 진현 시, 사신 입조 시 흑단령을 입으라고 하였다. 흑단령은 의례용인 만큼 고급 재료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시복이란 말로 쓰이지 않았고 다양하게 불렀다. 예복, 흑의 등. 반면 상복은 재료가 다소 저렴했고 계속 잡색을 유지했다.


    ​2) 흉배 제도의 시작


    단종 2년(1454년), 양성지의 건의로 종친부터 해서 당상관의 상복에 흉배를 달도록 하였다. 그러나 흉배의 가격이 비싸다 보니 당상관들 마저도 상복에 흉배 다는 것을 기피하였다. 대신 예복인 흑의에 흉배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원칙상 잡색인 상복에 흉배를 달아야 했다. 신숙주 초상화에서 신숙주가 초록색 상복에 흉배를 다는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럼에도 흉배는 흑의에 더 많이 부착되었다.


    신숙주(1417-1475). 소매가 좁고 잡색(녹색)의 상복에 흉배를 붙인 모습이다.



    3) 잡색이 홍색으로 통일되어 가다


    ​성종-연산군 대에 이르면 상복의 잡색이 점차 홍색으로 통일되어 간다. 성종은 이에 우려를 표했으나(文彩가 옅어질 것을 우려했다고 한다) 지켜지지 않았다.


    ​3. 16세기 이후(명칭의 분화)


    ​1) 명칭이 분화


    ​중종 대부터 흑단령을 '시복'이라 일컫기 시작한다. 홍단령인 상복은 점차 당상관은 담홍색(분홍색), 당하관은 심홍색(크림슨색)으로 분화되었다.


    송재 이우(1469-1517)의 초상화. 퇴계 이황의 숙부이다. 좁은 소매, 흑단령, 흉배를 부착한 시복을 입고 있다.



    서총대친림사연도. 명종 15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명종이 문무백관을 불러 연회를 베푼 장면을 그린 것으로, 명종 시기 담홍색과 심홍색으로 분화된 상복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통일 시도


    ​임란 직후인 1600년, 선조는 곤룡포와 색이 비슷하다는 이유로 상복의 색을 흑색으로 바꾸라 명령하였다. 하지만 당시 명나라로부터 고급 흑색 비단이 많이 들어와 있는 상태라 사치에 대한 염려, 그리고 품계 구분이 어렵다는 이유로 얼마 안 가 이전 제도로 환원되었다. 선조는 다만 너무 짙은 색은 쓰지 말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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