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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의 금주 전통에 대하여
    기독교 일반 2019. 3. 2. 20:47

    출처: http://srtmagazine.co.kr/?p=5943



    한국 개신교에서 전통적으로 금하는 세 가지 사항이 있다. 음주, 흡연, 제사이다. 반면 신자라면 꼭 해야 하는 세 가지 일도 거론한다. 예배, 전도, 헌금이 그것이다. 후자를 3행, 전자를 3무라 하여 3행 3무가 한국 개신교의 전통이 되어 내려오고 있다.


    여기서 금주와 금연 전통은 한국 개신교에서만 찾아질 수 있는, 한국 개신교만 갖고 있는 전통으로 보통 여겨지는 듯 하다. 여기서 흡연은 최근 건강 문제로 사회에서도 금기시 되어 가고 있지만 술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사회 생활하며 술을 안 마실 수 없는 이들이 과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마시는 것은 안 되냐고 많이 물어오면서 하는 말이 있다.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는 안 그런데 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금주를 명하는 것인지 하는 물음이다.


    좋다. 다른 나라에 비해 한국 개신교가 금주를 엄히 명하는 것은 사실이다. 음주의 기준이 서양에 비해 상향되어 있는 것 인정한다.


    그럼에도 음주 금지가 외국에는 존재하지 않는 한국 개신교만의 특이 케이스인 것은 결코 아니다.


    성경에서도 금주에 대한 권고를 많이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금주 전통에 반발하는 이들은 다른 나라 교회와 비교할 뿐만 아니라 직접 성경을 뒤적거리며 음주의 근거를 찾기도 한다. 이는 크게 세 가지 반문으로 나타난다.


    1. 다른 사람도 아닌 우리 예수님이 먼저 술을 드시지 않았느냐 하는 물음


    근거는 첫번째 이적으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셨다는 것. 예수님이 음주를 금하셨으면 어떻게 감히 포도주 만드는 기적을 행하셨겠냐 하는 물음이다. 그리고 적들에게 '술꾼'이라 비판 받으실(마 11:19; 눅 7:34)만큼 술을 많이 드신 게 아니냐 하는 물음이다.


    2, 3. 아울러 음주 금지의 근거 구절인 에베소서 5장 18절 "술 취하지 말라"에서 '취하는 것'을 금했지 '마시는 것'을 금하지 않은 것 아니냐는 물음이다.


    1. 예수님 사시던 곳은 이스라엘이다. 기후도 건조하거니와 지중해 연안에서부터 요단강 서편까지 고도가 점점 높아지다가 요단강 기슭에서는 푹 꺼져버리는 특이한 지형으로 기술이 발달하기 전까진 이스라엘 땅에서 강물을 사용하기는 쉽지 않았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바라봐야 했던 건 오직 하늘이었다. 그래서 겨울이 접어들며 내리는 이른 비와 건기로 들어서기 전에 내리는 늦은 비가 제때 오지 않으면 이스라엘은 재앙을 만난 것과 다르지 않았다. 이런 환경에서 식수는 당연히 부족하다.


    물이 부족한 대신 포도는 기가 막히게 열린다. 그러니 포도주가 식수 대용으로 많이 사용될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야말로 포도주를 어쩔 수 없이 마셨다. 물론 마시다보니 좋아서 일부러 마시는 경우가 더 많았을 것이지만 이스라엘은 기본적으로 식수가 부족한 상황을 감안해야 한다.


    이것은 유럽도 마찬가지다. 유럽은 예나 지금이나 석회암반 지대라 물 상태가 영 좋지 않다. 석회수를 많이 마시면 설사가 나고 여러 모로 좋지 않다. 유럽에서도 어쩔 수 없이 물 대신 술을 마실 수밖에 없다. 맥주나 포도주가 발달하고 각종 쥬스 등 음료가 발달한 것이 그 이유다.

    반면 한국은 식수가 풍부하기도 하고 질도 굉장히 좋다. 이스라엘과 유럽의 풍습을 그대로 들여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이 포도주 마시기를 즐겨한다고 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물을 포도주로 바꾼 이적은 '물'의 존재가 있기에 식수가 아닌 즐기기 위한 술을 주신 것 맞다. 그러나 가나 혼인잔치에서의 이적은 신학적으로 굉장히 심오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지면을 다 쓰기 어려울 정도다. 문자 그대로로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비방은 그야말로 비방이다. 과장이 섞인 것, 감안해야 한다.


    2. 성경은 엡 5:18 외에도 더 많은 곳에서 음주를 금한다. 


    금주를 명하는 성경 구절은 다음과 같다. 잠언 23:29-35; 로마서 13:13; 고린도전서 5:11; 갈라디아서 5:21; 에베소서 5:18. 


    생각보다 많다. 더욱이 잠언 23:29-35에서는 술을 '쳐다도' 보지 말라고 한다. 그런데 대개 성경을 통해 음주를 정당화 하는 사람들은 이 구절은 빼놓고 이야기한다. 모르는 것인가 알고도 빠뜨리는 것인가. 성경 좀 많이 읽자.


    성경에도 금주 권고가 많이 나오니 우리나라뿐 아니라 미국이든 유럽이든 금주에 대한 전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 금주 전통이 강화된 것은 종교개혁 시기와 경건주의 운동, 메도디스트 운동, 대각성 운동 때이다. 여기서 영향을 받은 선교사들이 들어온 곳이 우리나라다.


    게다가 선교사들이 왔을 무렵 조선 후기의 상황이 굉장히 막장이었다. 선교사들의 증언에 의하면 당시 남자들은 일을 하지 않고 술을 마시거나 노느라 정신이 없었고 일을 모두 여자들이 하고 있었다. 또한 전통적으로 우리 민족은 술을 잘 마시기로 유명했다. 음주가무를 즐기는 우리 민족. 박지원이 청나라 가서 술로 배틀 떠 이긴 이야기도 있다.


    선교사들 입장에서 그놈의 술 때문에 신앙이 제대로 자라지 않는 것을 강력히 제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본래 없던 원칙을 만들어낸 것은 분명 아니다. 본래 있던 규칙을 조선의 막장 상황에서 더욱 엄하게 적용하였고, 이것이 한국 개신교의 전통이 되어 내려온 것이다.


    3. 취함의 기준은 무엇인가?


    취하지 않을 정도만 먹어도 된다면, 취함의 기준은 대체 어디까지인가? 아마 절대적인 기준을 말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누군가 기준을 제시할 권한도 없고. 그러므로 취함의 기준은 사람마다 제각각 달라질 수밖에 없다. 술 한 잔을 마셔도 취한 것으로도 볼 수 있고 토할 때까지, 인사불성된 상태를 취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즉 '취하지만 않으면 마셔도 된다'라는 것은 굉장히 모호한 이야기밖에 더 되지 않는다.


    결론


    경건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음주를 하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신자들의 생각과 다르게 술만 안 마신다고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모든 의무를 다한 것은 절대 아니다. 술? 지극히 작은 의무일 뿐이다. 술 마시는 것보다 정의를 위해 싸우는 데 인색하거나 남의 등골을 빼먹고 남의 눈에 피눈물 흘리게 하는 게 훨씬 좋지 않다. 내게 만약 음주와 불의를 행하는 것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음주를 택하겠다. 그러니 제발 술만 안 마신다고 경건하다고 착각들 하지 않았음 좋겠다. 술 안 마시는 게 경건의 한 부분이고 시작일 수는 있다. 그러나 그게 마침은 아니다.  나 개인적으로 술을 굉장히 싫어하고(나는 그래서 술을 싫어한다고 말하지 않고 '증오한다'고 말한다) 개인적인 경건의 기준에 술이 차지하는 비중이 크지만 술만 안 마신다고 장땡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보면 참 답답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 때문에 교회 못 가겠다고 불평들도 좀 그만 했으면 한다. 신앙은 자기 욕심과 뜻을 점차 버려나가는 길이 아닌가? 금주가 그걸 연습하는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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