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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9년 3월 3일 주일 낮 예배 설교(3.1절 기념주일)
    기독교 일반/설교, 묵상 나눔 2019. 3. 4. 11:37

    프라 안젤리코, "변화"


    2019년 3월 3일 주현 후 마지막 주일, 3.1절 기념 주일 예배 설교


    누가복음 9:28-36 "진정한 영광의 길"


    기상 나팔 소리에 뛰어 일어나 단벌 이불을 개고 수건에 물을 짜서 몸을 훔친다. 홀딱 벗고 문 앞에 선다. 무명 수건 하나를 들고 문이 열리자 고개를 끄덕 하고는 복도를 달려 층계를 내려와 큰 문에 나서면 겨울 물에 풍덩 뛰어드는 것 같다. 정신없이 달리다가 문 가운데 놓인 허들을 훌쩍 뛰면서 입을 아 벌려야 한다. 뛰는 것은 항문 안에 감춘 것이 없다는 표시요, 아 하는 것은 입에 문 것도 없다는 증거이다. 감방과 공장 사이로 자그마한 것이라도 가지고 다니다간 벼락이 떨어진다. / 김광섭, “나의 옥창일기"


    옥에서 주는 조밥을 먹다가 돌을 깨물어서 이 한 개가 그만 부스러지고 말았다. 왠일인지 잇몸 전체가 상하고 염증을 일으켜 퍽 괴로웠다. 하루 3시간 이상을 자 보지 못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감옥 안에서는 누구나 다 앓게 되는 치질에 걸려 퍽 고생하였다. / 여운형, “옥중 회고록”


    많은 죄수가 앉아 있을 때엔 마치 콩나물 대가리 모으듯 되었다가 잘 때는 한 사람은 머리를 동쪽 한 사람은 서쪽으로 해서 모로 눕는다. 그러고도 더 누울 자리가 없으면 나머지 사람들은 일어서고 하는 통에 두 발로 먼저 누운 자의 가슴을 힘껏 민다. 그러면 누운 자들은 ‘아이구 가슴뼈 부러진다’하고 야단이다.  / 김구, “백범일지"


    날이 몹시도 더워서 풀 한 포기 없는 감옥 마당에 뙤약볕이 내리쪼이고 주황빛의 벽돌담은 화로 속처럼 달고 방 속에는 똥통이 끓습니다. 밤이면 가뜩이나 다리도 뻗어보지 못하는데, 빈대 벼룩이 다투어 가며 진물을 살살 뜯습니다. / 심훈, “옥중에서 어머니께 올리는 글월”


    재작년 서대문형무소에 갔을 때 본 글귀들입니다. 독립운동을 하다가 감옥에 갇힌 독립운동가들이 남긴 글인데, 서대문형무소의 생활이 얼마나 처참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선 열악한 건 둘째치고, 4평 밖에 안 되는 감방에 4~50명을 집어넣어 수감자들이 누워서 잠조차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별도로 화장실도 없어서 나무로 만든 통에 볼일을 해결하였고, 통풍이 되지 않았으니 얼마나 냄새도 심하고 위생 상태가 처참했을지 짐작이 갑니다. 서대문형무소에 가서 당시 열악했던 모습을 보니 친일파들이 어느 정도 이해가 갈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환경에서도 변절하지 않고 끝까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싸운 독립운동가들이 무한히 존경스러웠습니다.


    오늘은 교회력, 즉 교회달력상으로 주현절이라는 절기의 마지막 주일이자 3.1절 기념주일입니다. 한국 교회는 매년 3월 첫째 주를 3.1운동을 기념하는 주일로 보내는데, 올해는 더욱 뜻 깊습니다. 그것은 3.1운동이 일어난 지 올해가 딱 100주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때보다 더욱 3.1운동을 기리는 각종 행사가 개최되었고, 여러 영상 매체도 제작되어 방영되었습니다. 3.1절을 기리는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은 누가복음 9장 28-36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이 산에서 변모하신 사건, 일명 ‘변화산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변화산은 예수님의 사역을 가르는 분수령입니다. 예수님은 처음 갈릴리 지역을 중심으로, 치유와 이적, 그리고 말씀 선포를 하시며 큰 권능 있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제자들을 비롯한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보고 예수님이 이스라엘을 정치적으로 독립시키고 구원해 줄 메시아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가 일제에 지배를 받았듯이 당시 예수님이 사시던 이스라엘도 그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36년간 지배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그만치 500년이나 되는 긴 시간 동안 남의 나라 지배를 받았습니다. 한 나라의 지배를 받다가 그 나라가 망해도 독립하지 못하고 이어서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500년이면 조선왕조가 있었던 시기와 맞먹습니다. 아주 오랜 세월 남의 나라의 지배를 받았으니 독립에 대한 갈망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몹시 갖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손을 대기만 해도 병자가 낫고, 귀신이 나갔으며, 강력한 카리스마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당시 로마의 압제 하에 고통 당하던 백성들, 특히 하층민들과 어울리며 그들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빵 다섯 개를 가지고 남자만 5천 명을 먹이는 기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이와 같은 모습은 이스라엘 사람들 눈에 어떻게 들어왔을지 짐작이 갑니다. 자기들이 오랫동안 고대하던 메시아, 그렇게 꿈꾸던 독립을 이룰 사람으로 생각하며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이 온 이스라엘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이런 목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제자들에게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9장 18절에 제자들에게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고 물으시고 베드로가 예수님이 그리스도, 즉 메시아이시라고 대답하자 예수님은 22절부터 당신이 당할 고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자신을 따르려거든 십자가를 지고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에는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반응이 나오지 않지만, 다른 복음서를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항변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리고 또 다시 당신이 당할 고난에 대해 말씀하시자 제자들이 슬퍼하고 근심하는 모습이 나오죠. 예수님이 자기 나라의 독립을 이룰 분으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라니 실망할 법도 큽니다. 결국 그렇게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자기들이 생각한 메시아가 아님을 알자 뿔뿔이 흩어집니다. 그리고 도리어 예수님을 공격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아우성 치는 사람들이 됩니다. 즉 변화산 사건은 예수님의 사역이 ‘변화’되는 분수령입니다. 사실 변화되진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오신 진짜 이유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 주시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걸 몰랐던 사람들이 보기에 변화산을 기점으로 예수님의 사역이 변화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공생애를 이해할 때 변화산을 기점으로 앞은 1기, 뒤는 2기로 보면 그나마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변화산 말씀은 이렇게 제자들에게 청천벽력과 같은 말씀을 주시며, 자신의 사역이 변화된 것처럼 보이게 하신 그 이야기 이후에 등장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 중에 세 사람을 데리고 산에 올라가십니다. 그리고 기도하시는데 갑자기 용모가 변화되셨습니다. 용모가 변화되었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나와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 수 있는 건, 제자들 눈에 자기들 스승이 이전과 달리 굉장히 달라 보였다는 점뿐입니다. 옷이 희어졌고, 광채가 났다고 하는데 이는 예수님이 바로 신과 같아 보였음을 말해주는 단어들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구약의 대표 인물인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십니다. 모세는 구약의 앞 부분인 오경, 즉 율법을 전한 인물로 알려져 있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예언자의 대표격입니다. 우리로 치면 세종대왕과 이순신이 갑자기 나타나 여기서 저와 이야기했다고 한다면 여러분 제가 당연히 달라보이겠지요? 즉 제자들 시각에서 뭔가 능력은 많았지만 우리랑 크게 다르지 않은, 그저 사람이지만 재주가 많은 분으로 여겨졌던 예수님이 변화산 이야기를 통해 그게 아님을 알게 되는 겁니다.


    용모가 신처럼 변화되었을 뿐 아니라 자기들이 존경해 마지 않는 인물들과 스스럼 없이 대화하는 아주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보게 된 것이죠.


    여기에 감격한 나머지 베드로는 이 산에서 내려가지 말고 여기 계속 머물자며 초막까지 짓자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변화산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을 적에는 항상 앞뒤 문맥, 흐름을 살펴야 합니다. 갑자기 상관없는 이야기가 튀어나오는 것 같아도 문맥을 보면 엉뚱해 보이는 이야기가 왜 나오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난에 대해 이야기하신 후에 곧바로 변화산에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진짜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주십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진정한 영광의 길이 어디에 있는지를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즉 진짜 영광된 삶이 무엇인지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갈림길을 자주 만납니다. 어떤 갈림길이 펼쳐지는지 상황에 따라 달라지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비슷한 패턴이 나타납니다. 한 길은 옳은 일이지만 하기엔 어렵고, 그 길로 가면 고생이 훤한 길입니다. 다른 한 길은 옳아보이지 않지만, 바람직해 보이지 않지만 그 길로 갔을 때 좀 마음 편히 살 수 있는 그런 길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만나게 되는 갈림길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마음과 시각을 가진 사람들로서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갈림길을 맞딱드리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프지만 옳은 길을 택할 것이냐, 더럽지만 편한 길을 택할 것인가 하고 말이죠.


    예수님은 항상 이런 선택의 기로에 서 있는 우리들에게 어느 길을 택할지 오늘 말씀해 주고 계십니다. 산에서 제자들에게 당신의 영광스럽고 신령한 모습을 보여주시기 전에, 십자가라는 예수님 당신의 사역이 궁극적으로 도달할 목표를 말씀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가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이 사실 진정한 영광의 길임을 보여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변화산 사건을 통해 우리가 진정한 영광의 길을 선택하라고 말씀하시기 위함입니다.


    더욱이 오늘 3.1절을 기념하는 주일로서, 우리는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간 길을 보며 진짜 영광을 위해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서두에서 말씀드렸듯이, 독립운동의 결과는 더럽고 냄새나는 네 평 남짓되는 감방에 4,50명이나 되는 사람들과 수감 생활을 하면서 각종 병을 얻고, 인간 이하의 대접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감옥에서 풀려난 후 친일파로 전향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했던 것이 독립운동의 결과였습니다. 독립운동을 한 개인이 병을 얻고 유명을 달리 하는 것뿐 아니라 가족들이 일경의 감시를 받고, 좋은 직장에 다니지 못하여 집안이 기울고 망하기까지 하는 것이 독립운동을 했을 때 벌어지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진정한 영광의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가장 낮아졌던 이들은 가장 영광된 자리에 올랐습니다. 독립유공자로서 물질적인 혜택을 받는 것보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들의 이름을 생각할 때 존경할 수밖에 없는 명예를 얻었습니다. 이로써 우리 신앙의 선배들은 당장에 어렵고 고통스러웠지만 옳은 길을 택한 것이 궁극적으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잘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길과 그리고 그 길을 따라 걸은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보며 우리도 따라 걷길 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것이 있을 때 그저 참고 기도만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앞에 서서 잘못된 것을 바로잡을 줄 아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 당장에 손해를 보더라도 그에 구애받지 않고 예수님이 주시는 영원한 상급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바로 그 혜택을 누리며 지금 살고 있지 않습니까?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전쟁을 일으킨 전범 국가의 영토를 전후 어떻게 처리할지 머리를 맞대었습니다. 영토를 정하는 문제이기에 굉장히 민감하고 저마다 이해 관계가 달라 쉽사리 의견이 모아지지 않았지만, 신기하게도 연합국들이 만장일치로 동의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의 독립입니다. 물론 독립 이후에 정부를 어떻게 구성할지 의견이 갈려 분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럼에도 연합국은 한반도의 독립은 당연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사실 우리나라는 동양 삼국 중에서 서양 사람들이 가장 잘 몰랐던 나라입니다. 오죽했으면 우리나라를 가리켜 ‘은자의 나라’ 곧 ‘숨겨진 나라’라고 했을까요? 서양 사람들은 중국 일본은 잘 알아도 한국은 잘 몰랐습니다. 국력이 신장된 지금도 밖에 나가면 먼저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부터 묻고 그 다음에 한국인이냐를 묻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안중에도 없던 한국의 독립에 대해서는 예외 없이 동의했던 것일까요? 바로 우리 민족이 줄기차게 벌인 ‘독립 운동’ 덕분입니다.


    우리는 티베트가 중국에 의해 억압 받고 독립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어느 정도 하고 있습니다. 티베트가 우리나라랑 가깝기 때문이 아닙니다. 달라이 라마가 전세계를 떠돌며 티벳 독립에 대해 강연하고 강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티벳은 잘 몰라도, 그 나라가 독립해야 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식이 형성돼 있는 편이죠. 바로 우리의 독립 운동이 이와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잊혀질 때쯤이면 언론에 계속 한국인의 독립 운동이 보도가 되니 서양 사람들은 당연히 관심을 갖게 되고, 그로 인해 한국의 독립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2차 대전이 끝날 무렵 너나 할 것 없이 한국의 독립을 모두 동의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36년간 일어난 모든 독립 운동의 근원이 무엇인지 아시나요? 바로 3.1운동입니다. 3.1운동은 1919년, 즉 일제강점이 시작된 지 10년 정도 되었을 때 일어났습니다. 10년 동안 일제는 헌병에게 경찰 업무를 맡기고 학교에서 교사들에게 칼을 차게 하는 등 강압적인 무단 통치를 행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국권을 빼앗기 직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의병을 잔인하게 진압하여 거의 씨를 말렸습니다. 1911년에는 105인 사건이란 조작 사건을 통해 독립운동의 근거 세력이 될 신민회를 초토화시키기도 했습니다. 일제의 악랄한 조치로 약 10년 동안 독립운동이 기를 펼 수 없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에서 3.1운동이 일어난 것입니다. 3.1운동을 기점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도 세워지고 독립운동이 각지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3.1운동을 통해 우리 민족의 저력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일제는 잔인하게 독립운동을 짓밟았지만 독립운동은 끊이지 않고 이어졌고, 이를 통해 우리는 결국 독립을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 33인 중에 절반인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당장 눈앞의 이익을 취하지 않고 진정한 영광의 길을 택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안락하게 살아갈 수 있는 까닭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우리에게 다시 물으십니다. 안중근 의사가 묻습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묻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이 묻습니다. 유관순 열사가 묻습니다. 신석구 목사님이 묻습니다. 진정한 영광의 길을 택할 수 있겠느냐고 말입니다. 여기에 “예!”라고 대답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길 축원합니다. 


    문학진, "파고다공원의 3.1 독립만세 시위(19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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